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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 연륜에 경의를 표한다 - 경향신문 2003. 4 날짜 2004.06.19 14:51
글쓴이 고규홍 조회 3228
경향신문 2003-04-11

‘그 연륜에 경의를 표한다’


-이 땅의 큰 나무-

책 소개를 하기 전에 나무에 대한 기억을 꺼내야겠다. 혹시 청도 운문사 반송을 봤는지 모르겠다. 이마와 두 손, 두 발을 모두 땅에 대고 부처님께 절을 하는 ‘오체투지’의 모양으로 모든 가지를 땅에 내려놓은 반송은 신라 화랑의 훈련장이었다는 운문의 내력보다 더 감동스러웠다. 물속에 뿌리를 내린 청송 주산지의 왕버들은 마치 원시림에 온 것처럼 신비스럽고, 담양 명옥헌이나 진도 운림산방의 연못 가운데 심어진 배롱나무를 통해선 나무 한그루가 얼마나 주위를 밝게 꾸며놓을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이렇듯 큰 나무는 스스로 풍경이 될 뿐 아니라 때론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땅의 큰 나무’는 우리땅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이런 나무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아쉽게도 운문사 반송, 주산지 왕버들은 없지만) 모두 27종 130그루의 노거수가 들어있다. 수령 300~400년은 기본이고 1,000년이 넘는 고목도 있다. 천리포 수목원학술팀장인 고규홍씨와 사진작가 김성철씨가 3년 동안 발품을 팔아 기록한 것들이다.


사실 나무도 사람처럼 수종에 따라 제각각 표정이 있다. 소나무에는 엄격함이 있고, 은행나무는 까탈스럽고 정갈하다. 마을어귀에 많이 자라던 느티나무는 그 큰 그늘처럼 너그럽다. 꽃잎을 낱낱이 떨어뜨리며 산화하는 매화는 고결하며, 목을 댕강 분지르며 떨어지는 동백은 절개를 지키는 아낙네를 연상시킨다. 가지퍼짐이 거침없고 변화무쌍한 회화나무는 기개높은 선비같다. 그래선지 희한하게 영문이름도 스컬러 트리(Scholar Tree)다. 남도에 많이 분포한 배롱나무는 반질반질한 기둥에다 꽃송이까지 화려한 것이 풍류를 좋아하는 남도사람을 닮았다.


제각각 멋을 지닌 이런 나무가 한자리에 서서 풍진세월을 견디며 거목이 됐을 때엔 연륜만큼 사연도 있고, 얘기도 많다. 남원 오수마을의 느티나무나 송광사의 곱향나무처럼 지팡이가 자라 거목이 됐다는 전설, 해미읍성의 호야(회화)나무처럼 천주교 신자들을 목매달아 죽인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큰 나무는 결국 우리네 사람살이와 무관치 않다는 얘기다.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보아온 노거수는 신목(神木)으로 추앙받는다. 마을 앞 당산나무는 아마도 대대손손 마을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마음의 평화를 주었다.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험함도 나타난다. 추사가 자주 찾았다는 서울 통의동 백송은 돌풍으로 쓰러졌을 때 나이테를 조사한 결과 일제강점기인 36년 동안 나이테가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이런 큰 나무들이 점점 우리곁을 떠나가고 있다. 때로는 도시화로, 공해로 사라져간다. 일례로 명옥헌의 배롱나무(350쪽)는 2001년 8월 저자가 다녀갈 때만 해도 수백년 세월을 더 이어갈 것 같았지만 지난해 여름 기자가 찾았을 때는 태풍으로 2그루나 기둥이 부러졌다. 참고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수령 2,000년으로 추정되는 울릉도 도동항의 향나무이며, 정선 함백산두위봉 주목이 1,800살, 진주 초전남동 팽나무가 1,700살이다. 산림청 보호수자료에 따르면 1,000살이 넘는 나무는 느티나무 19그루, 은행나무가 12그루 등 모두 31그루다. 여름과 겨울 등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까지 보여주는 195컷의 사진에도 정성이 보인다. 2만원.


/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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