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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일정
제목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님 날짜 2002.02.15 09:43
글쓴이 고규홍 조회 486
1970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와 1천500m 두종목 2관왕을 차지한 趙五連씨(47)는
당시 일본 선수들이 판을 치는 아시아 수영계에 사상 처음으로 태극의 깃발을 올렸다. 출전 당시
기껏 동메달 정도를 기대했던 국내 관계자들도 깜짝 놀란 성적이었다.

전남 해남에서 10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趙씨는 우연히 수영경기를 구경하면서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해남고 1년을 자퇴, 무작정 상경, 간판집가게 잔심부름을 하며 수영선수로
서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중퇴인 그는 전국체전에도 일반부로 출전해야 했다. 한반도 땅끝에서
올라온 '생촌놈' 趙씨는 예상을 뒤엎고 한국신기록을 기록, 국가대표선수에 발탁되고 수영 명문 양
정고에 편입했다. 1969년, 趙씨가 아시안게임서 2관왕의 위업을 달성하기 바로 전 해의 일이다.

趙씨의 기록 경신 행진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趙씨는 4년 뒤인 테헤란 아리아머풀에서도 '아
시아의 물개'라는 별칭에 걸맞게 2회 연속 2관왕의 기록을 올렸다. 이후 趙씨는 한국신기록을 50
여차례 경신하고 대한해협과 영국 도버해협 횡단이라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78년에 아시안 게임에 참가해 동메달에 그친 뒤 곧바로 은퇴했어요. 욕심이야 '아시아의 물개'
가 아니라 '세계의 물개'가 되고 싶었지만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아온 외국 선수들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은행에 잠시 취직하기도 했고, 사학과로
편입해 미친 듯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역시 조오련이는 물 밖에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더군요."

80년 趙씨는 고향 선배인 가수 宋大寬씨의 소개로 만나게 된 패션 디자이너 金正福씨(33)와 결
혼, 봉제공장 사장으로 물 밖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봉제공장을 시작한 것은 스폰서 없이
스스로의 자금으로 도버해협 횡단에 재도전해보기 위한 미봉책이었다. 그러던 중 84년 12월 趙씨
는 자신의 포니 승용차를 타고 고향 해남에 가던 중 반대편에서 중앙선을 넘어온 8톤 트럭에 치어
오른쪽 어깨의 복합골절상 등 수영능력을 상실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었다.

"처음에는 많은 분들이 저의 이름만 믿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러다가 제가 사고로 죽게 됐다
고 하니 이제는 외상 결제도 안 되고, 참 난감했어요. 몸이 만신창이가 됐을 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온전치 않았어요. 수면제를 먹지 않고는 잠이 안 들 정도의 불면증과 우울증에 오래 시달렸어요."

5년에 가까운 방황 끝에 趙씨는 88년 제69회 전국체전에서 경영 심판을 맡으면서 동시에 계몽
문화센터의 연구위원으로 위촉, 한국 수영 발전의 초석이 될 어린 유망주들을 키우는 데 적극 나
섰다. 趙씨는 지난 89년 7월 강남의 압구정동과 안양시 안양3동에 지금의 '조오련 스포츠센터'를
개설, 제2의 수영인생을 펼쳐가고 있다. 조오련 스포츠센터는 수중카메라를 이용, 비디오를 통해 수
영 동작 하나하나를 교정하는 과학적인 수영 지도를 실시하고 있다.

知天命을 내다보는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몸도 보기좋을 정도로 불어난 趙씨는 '물찬 제
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케 한다. 두 아들 중 둘째인 중학교 1년생 성모
군이 자신의 400m 최고기록 21분18초를 훨씬 앞지른 18분46초를 기록하고 있을 만큼 그의 기록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수영에 대한 애착만큼은 아직 여늬 젊은이 못지 않다.

"조오련이라는 이름에 먹칠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을 하고야 말 겁니다. 국민적 성원을 받았던 만
큼 우리 국민에게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다시 또 일어서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겠습니까. 우리 나라 수영 발전에 어떤 형태로든 이바지하는 일 뿐이겠지요."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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